유럽은 세계 경제의 중심지 중 하나로, 수많은 선진국들이 높은 GDP와 탄탄한 산업 기반을 바탕으로 글로벌 경제를 이끌고 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들 국가들 중 상당수는 영화 산업에 있어서는 매우 제한적인 존재감을 보이고 있습니다. 경제력에 걸맞지 않게 연간 영화 제작 편수가 적거나, 국제 시장에서의 콘텐츠 영향력이 미미한 국가들이 많습니다. 본 글에서는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등 유럽 경제대국들의 영화산업 부진 원인을 정책, 문화, 시장 구조 등 다각도로 분석해보겠습니다.
독일: 유럽 최대 경제국, 그러나 영화산업은 왜 침체됐나
독일은 유럽 내 가장 강력한 경제력을 가진 국가로, 제조업 중심의 수출 산업이 세계적 경쟁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2024년 기준, 연간 영화 제작 편수는 약 250편 수준으로 프랑스보다 적고, 한국과 유사하거나 낮은 수치입니다. 이는 독일의 경제 위상과 비교하면 확연히 낮은 문화 콘텐츠 생산력을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독일은 베를린 국제영화제를 개최하며 예술영화 분야에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지만, 대중성과 상업성을 갖춘 글로벌 히트작은 거의 없습니다. 이러한 결과는 독일 영화산업의 구조적 한계에서 비롯됩니다. 대부분의 영화 제작은 정부 및 유럽연합 보조금에 의존하며, 민간 투자 기반은 매우 취약한 편입니다. 이러한 보조금 중심 구조는 예술성은 높지만 대중성을 확보하기 어려운 영화 중심의 제작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고, 이는 산업 확장에 제약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독일 내 소비자들은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 자국 영화의 흥행 가능성 자체가 낮습니다. 미국 영화의 압도적인 점유율은 독일 내 투자자들이 자국 영화에 관심을 갖기 어렵게 만들며, 이는 다시 투자 저조 → 제작 축소 → 수출 부진의 악순환으로 이어집니다. 언어 장벽 또한 독일 영화의 수출 확대에 장애물이 되고 있으며, 글로벌 시장에 통하는 장르적 접근과 콘텐츠 기획 역량 부족도 문제점으로 지적됩니다.
스위스와 네덜란드: 고소득 국가들의 콘텐츠 비활성화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유럽의 대표적인 고소득 국가입니다.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안정된 금융 시스템과 높은 국민소득을 보유하고 있으며, 네덜란드는 유럽의 물류 허브로서 기술력과 인프라 모두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영화산업에서는 그리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스위스의 경우, 연간 영화 제작 편수는 약 80~100편에 불과하며 그중 상당수가 단편영화, 다큐멘터리, 공공 교육 목적의 콘텐츠입니다. 영화 제작의 주요 언어가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으로 분산돼 있어 통일된 국가 영화 시장 형성이 어렵습니다. 이로 인해 개별 영화가 광범위한 국내 관객을 확보하기 어렵고, 자국 내 시장 규모 자체도 제한됩니다.
또한 스위스 정부는 문화 콘텐츠를 ‘수익 사업’보다는 ‘공공 예술’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문화 정책 역시 상업영화보다 실험적·철학적 작품을 선호합니다. 이런 정책 기조는 독립영화인에게는 유리할 수 있지만, 산업 규모를 확대하는 데에는 큰 걸림돌이 됩니다. 스위스 관객들 역시 자국 영화보다는 헐리우드 영화나 프랑스 예술영화에 더 친숙한 소비 성향을 보입니다.
네덜란드는 연간 약 130~150편의 장편 영화를 제작하고 있으며, 유럽연합 공동 펀드와 네덜란드 필름 인스티튜트의 지원을 받아 예술영화 위주의 시장 구조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익성과 흥행력을 갖춘 콘텐츠는 드물고, 자국 영화에 대한 대중의 소비 수준도 낮습니다. 영어권 콘텐츠에 대한 높은 의존도와 상대적으로 작은 내수시장은 네덜란드 영화산업의 성장에 제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공통 구조적 요인: 시장 한계, 정책 방향, 언어 장벽
유럽 경제대국들의 영화산업 부진은 몇 가지 공통 구조적 원인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내수시장 규모의 제한성: 인구가 1억 명 미만인 유럽 국가들은 내수만으로 안정적인 영화 시장을 형성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인도나 중국처럼 거대한 인구 기반을 가진 국가는 자국 내에서도 대규모 흥행이 가능하여 제작 투자 유인이 큽니다.
2. 언어의 다양성과 한정된 활용: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은 영어에 비해 글로벌 유통 효율이 낮아 해외 수출에 한계를 보입니다. 자막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국가에서는 이러한 언어 장벽이 더욱 큰 진입장벽으로 작용합니다.
3. 공공 중심 문화 정책: 유럽 많은 국가들은 예술 지원 중심의 문화 정책을 채택하고 있으며, 영화 역시 수익보다는 ‘문화 가치’ 중심으로 평가되고 제작됩니다. 이는 창작자에게는 유리하지만, 시장성과 지속 가능한 구조 확보에는 불리하게 작용합니다.
4. 미국 콘텐츠의 압도적 경쟁력: 유럽 관객들은 블록버스터와 시리즈 중심의 미국 콘텐츠에 익숙해 있으며, 이는 자국 영화의 상업적 성공을 어렵게 만듭니다. 결국 민간 투자자들도 미국 콘텐츠 유통이나 수입에 집중하게 됩니다.
결론
경제력이 곧 문화산업의 성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은 유럽 경제대국들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는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산업과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만, 영화산업에서는 구조적 제약으로 인해 세계적인 영향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문화 정책의 방향을 '지원'에서 '산업화'로 전환할 필요가 있으며, 자생적인 제작 및 배급 시스템의 구축이 요구됩니다. 또한 콘텐츠 기획력 강화, 국제 공동제작 확대, 글로벌 OTT와의 협업 등을 통해 유럽 영화가 대중성과 시장성을 동시에 갖출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합니다. 경제력에 걸맞은 문화 콘텐츠 경쟁력을 확보하는 것은 단순한 선택이 아닌 국가 브랜드의 지속가능성을 위한 필수 전략입니다.